-
내 인생 마지막 일기 12서른살 홍미모 시한부 일기 2021. 2. 28. 01:35
꾸미고 긋고.
아침에 눈을 뜨니 갑자기 머리가 하고 싶어 졌다.집 근처에도 내가 자주 가는 미용실들이 많지만
오늘은 청담동 유명 헤어샵을 가보고 싶었다.
나는 아이돌 연예인들이 자주 간다고 소문이 나있는
아주 유명한 미용실에 예약을 덥석 해버렸다.
예약을 하며 컷을 할 건지 펌을 할 건지 물어봤는데
또 덜컥 펌을 하겠다고 해버렸다.
헤어컷만 받아도 이런 곳은 가격이 어마어마할 텐데
펌을 하면 아마도 돈이 50만 원은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자 불안해졌지만
전화받는 사람에게 "펌은 얼마인가요?"라는 말을 하지 못해
찝찝한 마음으로 예약전화를 끊었다.
그런 말을 물어보는 것 자체가 창피하고 없어 보이는 행동이라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남은 인생은 더 이상 찌질하지 않게 좀 고급스럽게 살고 싶어 졌다.
나는 생각해둔 머리가 없었기에 급하게 인터넷으로
요즘 유명한 아이돌들의 머리스타일을 살펴보다가
억지로 나와 비슷한 머리 길이를 가진 누군지 모를
아주 어여쁜 연예인의 사진을 두 개 캡처해두곤 미용실로 출발하였다.
나는 사실 일 년에 미용실을 한번 갈까 말까 한다.
그저 머리를 기를 뿐, 일 년에 한두 번 상한 머리를 뭉텅 자르면 다시 어깨 즈음 오게 되고
또다시 일 년을 기르면 머리가 가슴 정도로 오게 된다.
지금 현재 내 머리는 가슴 정도로 길이이다.
화려한 외관의 삼층짜리 건물이었다.
긴장되는 모습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듯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약을 한 헤어디자이너와 그 조수들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성대한 환대가 내 인생에 있었을까.
내려가서 아이스티를 한잔 타 주시며 내 머리에 대해 상담을 받았다.
내가 챙겨간 사진을 보여주니 헤어디자이너는 이 사진과 거의 같은 머리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세 시간 반 넘게 머리를 한 것 같다.
머릿결이 상했다고 트리트먼트도 하고 탈모기가 보인다며 샴푸질을 할 때 마사지도 해주었다.
하지만 완성된 스타일은 내가 들고 간 사진과는 좀 달랐지만
서비스가 너무 훌륭하여 너무나 만족한다며 감사하다고 말하며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 계산을 하는데 36만 원이 나왔다.
나는 40~50만 원대를 생각했다가 생각보다 싸길래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내 카드로 결제를 하고 나왔다.
결제를 하고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헤어디자이너의 조수 두명이 따라 나와
문을 열어주곤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내가 순간 뭐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렛을 맡겼는지 물어보길래 나는 걸어간다고 말하였다.
집이 청담동 이 근처이기에 걸어간다는 느낌의 어조로 말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사실은 걸어서 버스정류장에 간 뒤 버스를 한번 타고 지하철을 두 번 타는데 말이다.
청담에서 걸어서 버스를 한번 타고
지하철을 두 번 타고 한 시간 동안 이동해서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오전에 씻고 준비해서 챙겨 나왔는데 하루가 다 가버렸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손으로 쓸어내리는데
내 머리에서 꽃향기가 났다.
미용실에서 해준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에 반해 내 얼굴은 칙칙하고 우울해 보였다.
이 머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머리가 주인을 잘못 찾았구나.
이게 무려 연예인들이 받는 미용실에서 받은 머리인데
정작 나는 연예인도 아니고 평범하고, 아니 평범보다 못한 사람인데...
내 분수에 맞지 않은 짓을 벌였다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기분이 좋아야지. 왜 이래.
안돼, 안돼. 돈을 36만 원이나 쓰고 와서 왜 인상을 구기고 그래.
웃어봐.
속으로 계속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요즘엔 이상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오늘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빈속에 담배만 한갑넘게 피고 나니
입에서 썩은 내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물도 음식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밥이나 물을 먹으면 내가 내 몸에 지는 거라 느껴졌다.
또 독한 약 다섯 알을 조금의 물로 목 뒤로 넘기고는
누워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 몸을 칼로 그어보고 싶다.
칼도 그냥 눈썹 칼 그런 조그마한 칼로
깊게도 아니고 얕게 내 팔에 바코드처럼 죽 죽 그어버리고 싶어 졌다.
이러한 생각이 든 건 처음이다.
그냥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하고 싶어 졌다.
피도 많이 안 날 거 같고 아프지도 않을 거 같았다.
아파도 잠시뿐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하고 나면
분명히 내가 후회할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계속 나는 안된다고 나를 도닥였다.
그래도 나의 또 다른 자아를 이기지 못하고
내 화장품을 정리해둔 서랍장을 찾아 눈썹 칼을 찾아내었다.
칼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계속 고민을 했다.
그어버리고 내 마음이 편해지고 내일 후회를 할지
아니면 끝까지 이 의미 없는 욕구를 누른 채 내일 안도를 할지.
결국엔 갑자기 칼을 꺼내 들어 주욱 팔뚝을 그어버렸다.
피가 생각보다 많이 나지 않았다.
화장솜으로 대충 스윽 닦은 뒤 다시 침대에 돌아왔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그냥 실행에 옮겨버리니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을 떨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아주 개운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많아질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 자신이 싫어서 자해를 한 것일까.
또 호르몬의 변화 때문일까.
사실 그 이유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럴 때에는 신경안정제인 자낙스를 먹어야 한다.
자낙스 두 알을 삼키고는 억지로 잠에 들었다.
'서른살 홍미모 시한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른살 시한부 일기 11 (0) 2021.02.25 서른살 시한부 일기 10 (0) 2021.02.24 서른살 시한부 일기 9 (0) 2021.02.11 서른살 시한부 일기 8 (0) 2021.02.10 서른살 시한부 일기 7 (0) 2021.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