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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오늘 새벽의 외로움이 좋아조울증-양극성장애 2021. 8. 17. 06:22

처음에야 약을 먹으면
내 몸안에는 차갑게 피가 식어가고
손발이 저릿저릿해져 괴로워 입안으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음식들을 마구잡이로 쑤셔 넣으며
고통을 잊기위해 발가락을 쭈욱 폈다가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어느새 잠에 스르르 든다.
그럴 때면 잠에 드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약을 어느정도 먹고 나면
내 몸도 독한 약에 적응을 하여
약을 먹어도 언제 먹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똘망똘망 밤을 새우게 된다.
자야지,, 자야지,,, 생각이 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잠에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달을 바라보면 어느 날은 발갛게 물들어있는 달이 슬퍼 보였고
어느 날은 소스라치게 파란 달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가느다란 우리 할머니의 손톱 같은 초승달을 볼 때면
나와 같은 처지인 거 같아서 눈물이 흐를 때가 있었다.
보통사람들은 잠을 자며 꿈속에서 몽글몽글한 꿈들을 꿀 때,
나는 차가운 새벽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과 홀로 싸우고 있다.
밤에 잠을 자는 이유는 아침에 일어나 할 일이 있기 때문인 텐데
매일매일 할 일이 없이 시간을 보내는 나에게는
굳이 밤에 잠에 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밤에 잠이 든다는 것은 나에게 큰 사치로 느껴졌다.
보통사람들은 낮에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만
나는 딱 밥 먹기, 숨쉬기, 배설하기밖에 하지 않는데
내가 감히 보통사람들처럼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야 할까.
새벽은 나 같은 잉여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의 시간이다.
약을 먹고 조금은 몽롱해지는 시선으로
달을 보고, 새벽에 마포대교를 건너는 차를 보고,
밤하늘에 보이는 구름을 보고...
신기하게도 밤하늘에도 또렷이 구름은 보인다.
밤 구름이다. 축복의 달빛 아래에 밤구름 역시 하늘을 채우고 있다.
밤의 구름은 낮의 구름보다 조금은 더 빠르게 움직인다.
여의도 사람들의 아침은 빠르다. 여섯 시부터 차가 많아진다.
새벽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것이 슬프게 느껴진다.
고독한 분위기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은 미화되기 시작한다.
미웠던 사람도 불쌍하다. 고마웠던 사람에게는 미안하다.
사랑했던 감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절해진다.
그리고 나 자신이 처연해진다.
외로움이 나를 덮친다. 향정은 그 외로움을 배로 더해준다.
새벽에 느끼는 이 외로운 감정은 딱히 싫지만은 않다.
낮의 외로움은 불쾌하게 느껴지는 반면에
새벽의 외로움은 전혀 불쾌하지가 않다.
조금 더 외로워지고 싶어 진다.
술 한잔 곁들이면 환상적인 외로움이 완성된다.
혼자만의 새벽이 오히려 감사해진다.
시끌벅쩍한 분위기였다면 이렇게 외로움이 나쁘지 않다는 걸 몰랐겠지.
해가 떠서 하늘이 파랗게 될 때까지
나는 눕지 못한다.
해가 떠야만 누울 수가 있다.
일종의 스스로한 약속 같은 거다.
하늘이 파래지면 기분 좋던 외로움의 감정이 싸악 사라진다.
이제는 고통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지긋지긋한 하루가 시작된다.
사회에서 필요치 않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잉여인 나의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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