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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낭만이 단 한톨도 남아있지 않은 밤조울증-양극성장애 2021. 8. 26. 03:19

나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버릇이 있다.
나의 모든 것들을 낭만화 시킨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토록 괴로웠던 상황, 날 괴롭게 만들었던 대상들을
아주 아름다운 상황과 사람으로 기억을 재정립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라고 했던가.
날 너무나도 괴롭힌 부모,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부모..
어디가 아프다는 소식에 눈물 콧물을 빼며 내 장기를 당장 떼어가라고 외쳐댔다.
10대 때 부모가 날 시골의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켜서
나의 꿈과 정신을 완벽히 파괴시켰던 그날.
그날이 나는 그리워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던, 그저 약만 꼬박꼬박 잘 먹으면 칭찬받을 수 있었던.
내 또래는 한 명도 없었지만 그나마 젊은 편이던 30살 언니가 산책시간에 주던 라일락 담배.
그 담배 맛이 그리워 라일락 담배를 찾아 헤매다 구할 수 있었다.
너무나 그리웠던 라일락 담배였기에 사진을 찍고
한대만 아껴서 펴보았다. 혀가 너무 쓰라렸다. 연기는 매캐했다.
내가 기억하던 라일락 담배 맛은 이게 아니다.
몰래 풀숲에 숨어서 아껴서 피던 라벤더 담배는 달콤한 라벤더 향기가 났었다.
달고 달아서 아껴서 폐끝까지 담아 폈었다.
그 언니를 다시 찾고 싶지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참 이쁘게 생긴 언니였는데.
헤어지던 날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쪽지에 몰래 써주고는 내 브라자 안에 넣어주었다.
그 쪽지를 간직하고 퇴원했는데 시간이 흘러 그 쪽지를 잃어버렸다.
20대를 망쳐놓은 나의 첫 남자.
그때는 나이가 엄청 많아 보였던 26살 아저씨.
무려 막 스무 살이 된 여자를 탐했던 남자.
그 남자는 지방에서 대학을 다닐 때 그 동네에서 함께
전여친과 동거를 하며 학교를 졸업했고,
낙태까지 여러 번 시켰던 어마 무시하던 남자.
전여친의 맹렬한 공격에 나를 구해주지 않았던 남자.
전여친을 성녀로 부르짖으며 사진 한 장 버리지 못했던 남자.
사실 나는 그에게 전여친과 같은 성녀로 기억되기를 바라서
내심 그의 아기를 가지길 원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피임약을 먹길 강요했다.
나는 바보같이 그가 여자 몸에 좋지 않은 피임약을 강요하는 것에
서운한 것이 아니라 나와는 임신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그의 의지가
느껴져서 서운해서 울었다.
그리고 피임약을 매일 먹으며 구토를 하며 서운함에 울면서 잠에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나이를 먹었고
그는 나와 헤어지기도 전에 막 스무 살이 된 아이를
임신시켜서 나에게 통보도 없이 떠났다.
처음에는 그 여자 아이가 너무 미웠다. 한편으로는 부러워도 했다.
그토록 증오하던 인간이었건만,
지금은 그 남자의 좋은 점만 떠오른다.
얼굴이 하얗고 웃는 게 연예인 김재원을 닮았었다.
최근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심 나에게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꼴이
너무 안쓰럽고 내 자신이 한심하고 추악하게 느껴졌다.
나의 과거 속에서 그 남자는 더 성스럽게 변하고 있다.
아. 네가 네 전여친을 성녀로 기억했던 것처럼.
나도 너를 성인으로 낭만화하고 있나 보다.
웃기다. 그래, 너도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만큼 시간이 흘렀으면 나도 네 기억 속에서 성녀가 되었겠구나.
힘들었던 외국에서 외노자 시절.
처음 공황발작과 과호흡을 일으켰던 시절.
사무치도록 그 시절이 그립다.
그 시간은 지금보다 내가 젊었고 장소는 아름다운 유럽이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공황 따윈 이겨내 버릴 텐데.
이불속에서 과호흡을 하며 짐승 소리를 내고 있을 때
그래도 그곳에서 그러고 있는 게 축복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곳을 지옥으로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곳이야 말로 낙원이었다.
낙원 속에서 나는 무엇이 힘들어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이래서 인간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걸까.
과거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다.
눈만 감으면 과거의 향기, 촉각, 시각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때와 100% 일치하지는 않다.
향기는 달콤하고 행복한 코코넛 향기로
촉각은 말랑말랑하고 간질간질한 기분 좋은 느낌으로
시각은 보정이 잔뜩 들어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이 느껴진다.
과거 속에서 사는 인간은 불행하고 참 멋없어 보인다는데.
그렇게 보여도 상관없이 과거속에서 계속 살고 싶은걸.
멋없어 보이면 어때, 그 과거가 나에게 허용된 유일한 낙원인걸.
현재는 아무리 좋은 필터를 끼고 봐도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지금 내 앞의 거울에는 나의 모공과 늘어진 주름이 보이고
창문 밖을 바라보면 미세먼지로 가득 차 뿌연 하늘이 보인다.
아니 하늘이 보이지도 않는다.
씻지 않아 피지 냄새가 나는 내 정수리 냄새와 불쾌한 살 냄새가 풍겨오고
원룸에서는 좁고 습해서 아무리 섬유유연제를 넣고 빨아도 옷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가 난다.
그리고 담배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라이터를 켜느라 까슬까슬해진 내 손이 느껴진다.
아, 터보 라이터로 바꿔야지.
아 신님, 시간이 지나면 이 고독한 순간도 낙원으로 보일까요.
모든 경험을 살펴보면 이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낭만화 작업으로
아주 멋진 영화의 한편으로 추억할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손톱만 한 초승달이라도 보고 싶을 뿐인데...
그 달이라도 보면 내 마음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 같은데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밤이다.
아니 낭만적이라고 할만한 것은 단 한 톨도 없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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